[DJ entertainment]



 
작성일 : 13-04-12 14:21
‘댄싱퀸’ ‘패션왕’ ‘더 킹’…라미란은 거기에 있었다
 글쓴이 : DJ ENT
조회 : 2,532  
이제 막 교도소를 출소한 금자에게 "그 새낀 죽였어?"라고 묻던 감방 동료 수희, '신촌 마돈나' 엄정화를 꼬드겨 오디션장에서 신나게 막춤을 추던 영화 '댄싱퀸'의 명애, 드라마 '패션왕'의 미싱1과 '더 킹 투 하츠'의 궁중실장까지. 단번에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이 다음 만날 라미란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까.

누군가 나에게 "'더 킹 투 하츠(이하 '더 킹')'에 출연한 무뚝뚝한 궁중실장이 '패션왕'에 나오는 미싱사야"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의 반응은 "에이, 설마"였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고 약간의 충격을 동반했다. 단순히 일주일에 4일, 동 시간대 드라마에서 보는 두 얼굴이 동일 인물임을 알아채지 못한 것의 문제는 아니었다. 서울예대 93학번,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기본기를 닦고 서른이 되어 영화와 드라마를 시작한 여배우 라미란(38)이 돋보이는 이유는 배역과 작품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아주 잠깐의 스침에도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그녀는 어느새 감쪽같이 그 흔적을 지우고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난다. 그녀의 이전 작품을 기억해내지 못해도, 매번 '처음 보는 얼굴'이라 해도 괜찮다. 귀신같은 보호색을 지닌 그녀와의 숨바꼭질은 즐겁기만 하다.





레이디경향(이하 'LADY') 드라마 '더 킹'과 '패션왕'이 동시에 막을 내렸다. 소감이 어떤가.
라미란


시원섭섭하다. 사실 속이 다 시원하다. 동시에 두 개의 드라마를 한 건 처음이었다. 비중이 크지 않은 역이라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작업이라는 것이 워낙 예측하기 어려운지라 스케줄이 꼬이더라. 내가 누굴 기다리게 할 입장이 아닌데,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마음을 많이 졸였다. 영화는 촬영이 끝난 후에 후반 작업이 있고 개봉까지 시간이 있어 계속 작품에 몸담고 있는 느낌이 있는데 드라마는 쫑파티하고 나니 정말 끝이더라. 3개월 동안 뭔가에 씌었다가 빠져나온 느낌이다. 끝나자마자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랑 캠핑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한적한 곳에 가서 하늘을 보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LADY '더 킹'의 과묵한 궁중실장과 '패션왕'의 수다스러운 미싱사, 180도 다른 두 캐릭터를 오가며 연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듯하다.
라미란


오전에 '패션왕'을 찍고 오후에 '더 킹'을 찍으면 난리가 나는 거다. 머리를 풀었다가 지졌다가, 화장을 했다가 지웠다가. '더 킹'에서는 지위가 있는 역할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고, '패션왕'에서는 머리도 뽀글뽀글 볶고 화장도 좀 하고. 두 가지 스타일을 왔다 갔다 했다. 극과 극을 오가긴 했지만 그래서 같이할 수 있었다. 전혀 다른 캐릭터라서 욕심을 냈다. 비슷한 역할이면 못했을 거다.

LADY 두 사람이 같은 배우라는 걸 알고 나서도 쉽게 연결이 안 됐다. 심지어 체형까지 달라 보이더라. 스타일링만의 효과는 아닌 듯하다.
라미란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는 자주 듣는다. 아직 인지도 면에서 잘 모르는 분들도 많고, 내가 워낙 여기저기 숨어 있으니까(웃음), "그때 그 배우가 이 배우야?"라며 못 믿는 분도 계신다. 배우로서 그런 면에선 쾌감을 느낀다. 평소에도 가는 곳마다 행동과 말투, 표정이 확확 달라지는 편이다. 원래 현장에서 농담하고 분위기 띄우는 걸 즐기는데 '더 킹' 촬영장에선 농담도 잘 안 했다. 현장과 캐릭터에 금방 젖는 스타일이다.

LADY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처음에는 단역이었다가 조연, 이제 주연에까지 이름을 올린 작품도 있다. 그동안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어떤가.
라미란


처음에는 대부분 '행인1', '옆집 아줌마' 같은 이름 없는 단역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전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요즘엔 엔딩 크레디트 앞에 우정출연, 특별출연을 붙여주시더라. 크고 작은 역을 오가고 있지만 연기할 때는 다 똑같다. 한 신이 나오든, 열 신이 나오든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늘 같은 마음이다. 작품과 캐릭터의 차이일 뿐 비중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LADY 그런 이름 없는 단역들이 어찌 보면 캐릭터 잡기가 더 힘들 것 같다.
라미란


배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주변 사람들과 상의하거나 혼자 이런저런 설정을 많이 해본다. 짧은 시간에 승부를 봐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에너지를 많이 쏟게 된다. 때문에 자칫 오버스럽거나 과도한 연기가 나오기 쉽다. 너무 차분하면 임팩트가 없고 또 너무 튀는 건 안 되니까. 다른 배역들과 어울려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잔잔함 속에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그 적정선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제일 중요한 건 관객을 극 속으로 끌어당기는 리얼함이라고 본다. 아마 모든 조연들의 고민이지 않을까 싶다.

LADY 그런 면에선 탁월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보고 있으면 영화에 현실을 불쑥 끌어당기는 리얼함이 있다.
라미란


얼굴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내가 주변에 한두 명쯤 있을 법하면서도 묘하게 인상을 남기는 얼굴이다. 나름 내가 가진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웃음). 얼마 전엔 영화 후시 녹음을 하러 가서 모니터링을 하는데 내가 너무 못생긴 거다. 감독님께 "어떡하실 거예요"라고 하니까 감독님은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 예쁜 사람이 또르르 눈물 흘리는 것보다 이런 얼굴이 눈물 흘리는 게 정말 슬프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나 코미디를 하는 사람들의 눈물은 더 가슴을 친다. 광대의 눈물, 그런 아이러니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게 있다.

LADY 작품마다 다른 눈빛을 가지고 연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게 배역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맨 처음 연기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건 언제인가.
라미란


딱 어느 지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3 때 연기 전공으로 진로를 바꿨을 때가 아닌가 싶다. 고향이 강원도 고한인데 그 작은 탄광촌에서 시끌벅적하게 자랐다. 동네 아이들과 마을 평상을 무대로 꽁트를 만들기도 하고,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학교 다닐 때는 오락부장을 도맡아 했다.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였다. 그걸 다 할 수 있는 게 연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3 5월인가, 학교에 지각한 날이었는데 버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다 문득 '연극은 종합예술이다'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떠오르더라. 그 길로 교무실로 가 선생님께 연기 지망으로 바꾸겠다고 말씀드렸다. 원래는 일어일문과 지망이었는데, 선생님께 혼나긴 했지만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LADY 어린 시절 경험들이 연기에 도움이 됐나.
라미란


연기라는 게 수학처럼 풀이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배워서 아는 건 아닌 것 같다. 까만 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게 지금 내 연기에 자양분이 됐다. 두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어머니께서 혼자 5남매를 키우셨다. 어머니가 지게 지고 일하시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애틋한 감성이 있다. 극장도 없는 시골에서 영화 한 편 못 보고 자랐지만 그 대신 또래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겪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가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나이보다 20년은 더 산 것 같다"라고 하는데 그런 감성과 경험들이 연기로 나타나는 것 같다.

LADY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과 뮤지컬 무대 위주로 활동했다. 2005년에 첫 영화를 찍었으니 연기 경력에 비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라미란


서울예대 93학번이다. 학교에 워낙 예쁜 친구들이 많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방송은 예쁜 애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무대는 방송 쪽보다 다양하니까 내 길은 무대라고 여겨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연극과 뮤지컬을 꾸준히 했다. '친절한 금자씨'를 찍었을 때가 서른 살이었는데 오히려 20대 때 드라마를 했다면 이도저도 아니었을 것 같다. 젊은 역을 하기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고 그렇다고 노역을 하기엔 애매했으니까. 이제야 얼굴에 나이가 맞춰진 것 같은 기분이다. 배우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배우로서 좋은 외모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도 능력이라 보는데 나는 그런 것이 없으니 시간으로 대체한 거다. 지금의 연기력으로 TV에 나오는 것이 좋다. 드라마든 영화든 내가 연기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 요즘 너무 재밌다. 오히려 나이 들어 시작한 게 나에게는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LADY '친절한 금자씨'에서 교도소 마녀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다가 금자의 도움으로 구원받는 오수희 역을 연기했다.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라미란


스물여덟 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2년 정도 쉬다보니 다시 연기가 하고 싶더라. 그때 오디션을 봤는데 이틀 만에 됐다고 연락이 왔다. 첫 영화다 보니 나름 긴장을 많이 했다. 연극배우들은 스크린에서 지나치게 튀는 경향이 있다. '오버하지 말아야지' 이 생각만 하고 찍었는데 워낙 강한 캐릭터가 많았던 작품이어서 그런지 그런 평이함이 나름 독특한 인상을 줬던 것 같다. 사실 아이를 낳고 오랫동안 쉬다가 다시 연기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다. 운 좋게 영화를 찍고 오랜만에 연기를 하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열망이 느껴지더라. 그 이후로 배역이 들어오면 닥치는 대로 했다.

LADY 작품 수가 적었던 것도 아니고, 말한 대로 아이를 키우는 상태에서 스케줄이 일정치 않은 일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연기를 시작했을 때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
라미란


남편을 공연을 하며 만났다. '드라큘라'라는 뮤지컬 주인공이 가수 신성우씨였는데 그때 남편이 신성우씨의 매니저였다. 연습실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며 친구처럼 지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있더라(웃음).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이 일에 대해 충분히 알고 이해를 해준다. 지방 촬영이 있을 땐 아이와 함께 보러 내려오기도 하고, 부모님께서 아이를 봐주셨다. 가족들에게 신세진 게 많다.

LADY 경력에 비해 비중이 작은 역을 연기하며 아쉬웠던 적은 없었나.
라미란


'친절한 금자씨'로 영화를 시작한 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신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연급이었고 영화 자체가 워낙 화제가 됐었으니까. 다음 작품을 단역으로 가도 홀대하지 않더라. 캐스팅 담당자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죄송합니다. 역할이 너무 작아서"이다. 많이들 챙겨주시고 신경 써주셔서 비중이 작은 역을 하면서도 내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 서럽거나 아쉬웠던 적은 없다. 그리고 내가 현장에서 워낙 가만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금방 친해지고 오랫동안 연락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연들이 작품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LADY 30대 중후반 남자배우들이 확실한 캐릭터를 가지고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에 비해 강하게 어필하는 여배우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라미란


여배우들에게 30대 중후반은 어려운 나이다. 스타 여배우들은 하나 둘씩 포기하기 시작하는 나이고, 조연들은 배역의 한계 때문에 밑에서부터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여자 조연배우들의 단골 배역이 주인공 친구다. 작품 내에서 단독적인 캐릭터를 가지기보다 주인공의 주변인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캐릭터의 폭이 넓지 않다. 시나리오 자체가 다양해져야 캐릭터의 폭도 넓어질 텐데 나만 해도 주인집 아줌마, 옆집 아줌마, 뒷집 아줌마 등 안 해본 아줌마가 없다(웃음). 그 안에서 또 만들어나가는 것이 배우의 몫이니까. 내공 있는 배우들은 아무리 숨어 있어도 언젠가 빛을 발하더라. 최근에 드라마를 하며 선배 연기자들을 뵐 기회가 많아졌는데 젊은 배우들보다 체력이나 열정 면에서 절대 뒤지지 않으시더라. 나도 저런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 번에 강하게 때리는 것보다 서서히 흔적을 남기며 오래하고 싶다. 자리에서 못 일어설 때까지 연기하는 게 목표다.

LADY 연기에 대한 철학이 있나.
라미란


내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삶에서 체득되는 경험, 사람, 일상, 감정들이 내 연기의 주원료다. 가끔 모니터에 비치는 내 얼굴이 참 못났다 싶어 주사를 한 대 맞을까 하다가도 그런 자연스러운 느낌이 연기할 때 참 좋은 거다. 그래서 감독님들이 나를 보고 그렇게들 예쁘면 안 된다고 그러시나보다(웃음). 연기를 하며 다른 인물로 살아가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니까 이제 라미란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연기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본다.

LADY 이번 달만 해도 '두 개의 달'과 '무서운 이야기' 두 개의 공포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무엇인가.
라미란


조만간 하고 싶은 역할은 음… 로맨스? 언젠가 팜므파탈 역은 꼭 한 번 해보고 싶다. 함께하고 싶은 남자배우 리스트를 작성 중이다(웃음). 서른여덟 살인데 다시 청춘이 된 기분이다. 이제까지 겁이 나서 하지 못했던 일들에 자꾸 끌린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민영주>